환국

한국(韓國)은 漢(桓)자문화권의 주인공 -임승국

알마자야 2007. 12. 28. 01:56

 

韓國은 漢(桓)字文化圈의 主人公 (1)
桓文(漢文)의 文字史에 대한 檢證
 
虛虛空空
 
桓文(漢文) 文字史 대한 檢證

                                                                                                   林承國  著

中國「注音字母」制定 示唆하는

 한문(漢文)이 한국문자(韓國文字)라니 엄청난 얘기다. 그러나 漢文을 창제하고 한문문화(漢文文化)를 4~5천년 동안 지켜온 주인공이 한국인이라고 하는 실증이 있다. 현존하는 한자(漢子) 53,525자[집운소록(集韻所錄)]의 발음부호인 반절음(反切音)이 모두 우리말 기준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 그런가 하면 지나인(支那人)들은 민국7년(民國七年)[1918년] 11월에 주음자모(注音字母)라는 표음문자(40자−現用37자)를 제정하여 가지고, 옥편상(玉篇上)의 전통 깊은 저 반절음과는 전혀 다르게 한자발음(漢子發音)을 표기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은 그 어떤 진실을 시사하는 것일까? 漢文은 그 모체문자(母體文字)인 갑골문자(甲骨文字)때부터 동이족(東夷族)인 은민족(殷民族)의 소산이었다. 이제 갑골문자 이래 漢子에 이르는 인류최대의 표의문자(表意文字)−환문[桓文(漢文)]의 문자사(文字史)를 검증해 본다.

 주지하다시피 漢文은 세계의 현용문자(現用文字)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표의문자일 뿐 아니라 <문자의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5만여字의 漢文숫자(數字)가 위선 위압감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실로「중국문화~중국역사의 위대성」이라고 하는 기성관념 속에는 한자의 경이(驚異)와 그 위압감 때문에 생긴 반사효과가 상당한 비중을 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곧 漢文이나 한문문화(漢文文化)를 보고「중국의 위대함을 안다」고 하는 통념은 상식화되어 있다. 차라리 <당연한 인식>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촉매작용을 하는 한자나 한문문화가「중국의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것」이라고 할 때 종래의 문화사나 가치관에「코페루닉스」적 이변을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漢子~漢文문화권의 주인은 한국이다>하는 사실만은 불변의 것이다. 그러므로 漢文의 발상연혁(發祥沿革)과 그 발전사를 규명(糾明)코저 하는 이 시도는 동양문화의 종주권 다툼을 하는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라고 하리라.

 

發祥沿革 發展史糾明 실마리

도시(都是) 종래에는 동양문화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잘못되어 있었다. 황하문명은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여건만을 기준하여「중국인이 주도한 고대문명이다」라고 인정하여 왔는데 이 엄청난「몰상식!」부터가 교정되어야겠다. 오늘날 래틴아메리카에는 콜럼브스」이후에 이주한 구라파(歐羅巴)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옛날 그 고장에서 꽃피었던「잉카문명」이 오늘날 그 고장에서 살고 있는 서구인들의 문명이라고 한다면 웃기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웃기는 얘기」가 황하문명에서는「웃기지 않는 얘기」로 통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황하문명이 한창일 때 중국인들은 황하연변(黃河沿邊)에 살고 있었던가? 황하문명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황하연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룩된 문명이다. 그런데 황하문명이 꽃필 무렵 아니 그 훨씬 이전서부터 황하연변에는 오직 東夷만이 살고 있었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금의 지나사서(支那史書)와 그 사학자(史學者)들이 시인하고 있든 바다.

 슈멜(Sumer), 악카드(Akkad), 타림(Tarim) 계통의 서방족(支那)들이 바이칼(Baikal)湖 계의 동방족보다 늦게 중원대륙에 진입하였다는 것은 오늘날 사학(斯學)의 일반적 견해다. 

 소련의 인류학자 ‘Sherocogorov’는「퉁구스(Tungus) 만주족의 조상은 지미(之未) 중국의 북부에 살고 있었다(=황하연변에 살았다)하였으며, ‘Perker’와 Koppers’는「그와 같은 先퉁구스(Pre-Tungus)들이 B•C 3,000년경부터 황하ㆍ양자양강(兩江)의 유역을 따라 서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지나인(族)에 의하여 차츰 북쪽으로 재이주(再移住)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동방족이 서방족보다 중원본토에 선주(先住)한 것은 시간적으로 약 15,000년으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Sherocogor-ov’나 ‘Perker’ 또는 ‘Koppers’ 등이 말하는 서방족은 지나족의 정수부족(精髓部族)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 혹은 주왕실(周王室)이 동이(東夷) 아닌 「서이지인(西夷之人)」인 것처럼 기술되었지만 설령「西夷之人!」이라 하더라도 저들은 오늘날 지나족의 조상이 아니오 夷임에는 무위(無違)한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하우(夏禹) 스스로가 東夷人 임을 강조 시인한 글이 오월춘추(吳越春秋)에(註1) 있고 비록 주무왕(周武王)이 서방족(西夷)이라 하더라도 주왕실 창건의 절대적 무공이 있고 그 주력을 이뤘던 강태공여상(姜太公呂尙)이 동이지사(東夷之士)라는 것은 사기 기태공세가(奇太公世家)가 확언하는 바다. (註2) 그렇기 때문에 하은주3대(夏殷周三代)까지 그 통치자가 누구였든 간에 치자계단(治者階段)과 국민대중은 모두 지나인이 아니고 東夷였다. 이것은 ?언을 요치 않는다. 하조(夏朝)의 말왕(末王) 걸(桀)을 토멸(討滅)하는데 있어 하걸왕이 동이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은탕왕(殷湯王)이 반걸(叛桀)의 전(戰)을 결행하느냐 유보하느냐 하는 시금석으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湯欲伐桀 伊尹曰 請阻乏貢職以觀其動 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
 伊尹曰未可 彼猶能九夷之師是罪在我也 湯乃謝罪復入職頁 明年
 又不貢職 桀起九夷之師九夷之師不起 伊尹曰可矣 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
                                                                     설원(說苑)[註3 해석문]  

 19세기이래 고고학을 바탕으로 한 서양인들의 과학적인 사학연구의 예봉(銳鋒)이 동양3국에도 미치게 되자 최초에는 중국고전에 대한 불신풍조가 일어나 요(堯), 순(舜), 우(禹)등을 모두 황당무계한 설이오, 신화적인 소리다 등의 주장이 학계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殷문자(갑골문자)가 발굴, 연구되고 용산(龍山), 앙참(仰站)의 문화유적이 발굴되자 중국의 역사는 은대(殷代)까지는 믿을 수 있다 하고 다시 최근에는 서경(書經)에 기록된 역수(曆數)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요순(堯舜)까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고고학의 연구성과는「포희씨시대(包犧氏時代)[4,032~3,332 B•C]가 세석기문화(細石器文化), 신농씨시대(神農氏時代)[3,332~2,732B•C]가 강도문화(江陶文化), 황제시대(黃帝時代[2,732~2,392 B•C]가 채도문화(彩陶文化), 순대(舜代)[ 2,255~2,208 B•C]가 회흑도문화(灰黑陶文化)」라고 정설화 되고 있다.

 근대 이후 사학연구가 고고학, 인류학 등 방계과학(傍系科學)의 지원을 받으면서부터 종래의 지나 중심의 낡은 사관(史觀)은 그 사통(史統)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제 자유중국내의 사학자까지도 해묵은 중화사관에 집착하려는 학풍에서 해방되고 있다.(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소개한 것처럼‘Sherocogorov’는「B•C 3,000년 경(頃)부터 서방에서 침입하는 지나족의 압력으로 先퉁구스(東夷)들은 중원대륙을 버리고 북쪽으로 재이주(再移住)하기 시작했다」했지만 이러한 재이주(再移住)는 그 뒤 약 2,000년 후(A•D元年頃)에 시작된 일이다. 중국사가(中國史家) 및 사서(史書)는「동이의 주력이 B•C 3,000년 후에도 계속해서 중원을 원사이드하게 지배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비록 이때 만주방면(滿洲方面)으로의 재이주(再移住)가 개시되었다 하드라도 그 이동은 점차적ㆍ부분적인 것이었으리라. 동이의 주력이 중원을 떠난 것은 삼국통일시(7세기)까지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史家의 주장 속에서도 「춘추(春秋)때에 지나주권(主權)이 미치는 강역은 겨우 중원대륙의 오분지일(五分之一)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임혜상(林惠祥)의 글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淮南爲羣舒 秦爲戎 河北 眞正 中山之境 乃鮮虡肥鼓國河東之境 有亦狄甲氏
留吁鐸辰潞國 洛陽爲王城 而有揚扼泉皐蠻氏陸渾伊雒之戎東京有萊牟介莒皆夷也 把都雍丘今汗之屬邑 亦用以禮 邾近於魯亦曰夷 其中國者獨晋 衛齊魯宋鄭陳許統不過數十州 盖於天下持其五分之一耳(客齊隨筆 卷五 林惠祥)

 한편 그는「춘추 때에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 중국에 쳐들어와 그 세(勢)가 심성(甚盛)하였고 성주시대(成周時代)[하남성 낙양현 동북의 낙읍(洛邑)−주공(周公)이 낙읍을 동도(東都)로 한 후 다시 하도(下都)를 만들고 이를 성주라 함 B•C 1,020년]의 중국 땅은 최협(最狹)하여 오늘날의 오월(吳越)[상해(上海)등지] 초촉(楚蜀)사이가 모두 외국의 땅이 되었었다」고 그의 중국민족사에서 되풀이 주장하고 있다(註4).

 뿐만 아니라 중국정사 후한서(後漢書)도「하우태강연대(夏禹太康年代)[B•C 2,190년]에 동이가 하조(夏朝)를 침범하고(夏估氏太康矢德夷人始畔...桀爲暴虐諸夷來侵…) 은나라 중정왕(仲丁王) [B•C 1,616년]때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북조<北朝>의 제후중의 하나인 남이(藍夷)가 은의 땅을 침(侵)하기 300년간 하고(至于仲丁, 藍夷作寇 自是 或服或畔 300餘年)] 무을왕(武乙王) [B•C 1,100년]이 쇠(衰)하자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岱)로 옮겨 점차 중원 땅에 자리잡게 되었다(武乙衰敝 東夷寖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한서는 서언왕(徐偃王)이 회강[양자강~황하간의 대하(大河)] 일대에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국(大國)을 세웠다고 대서특필하였다.(때는 周穆王− B•C 1,000년대이다)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命徐偃王主之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 行仁義陸地
而朝者三十有六國(註5 해석문)[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동이의 정통적 신화는 난생설(卵生說)이다. 그런데 박물지(博物誌)는 서언왕의 난생설을 다음같이 기록했다. (註6 해석문) 

 博物誌曰 徐君宮人娠而生卵以為不祥棄於水浜 孤獨母有犬名鵠倉
得]所棄卵銜以歸母 母覆暖之 遂成小兒 生而偃故以為名 宮人聞之乃更錄取
長襲為徐君 尸子曰 偃王有筋而無骨故曰偃也[후한서 권85, 동이열전75] 

 순대이래(舜代以來)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중국의 고문헌들은 동방족을 숙신씨(肅愼氏), 식신씨(息愼氏), 주신씨(州愼氏)등을 기록했는바 이 숙신은 정작 갑골문자에까지 보이는 조선의 이두표기(吏讀表記)인 것이다. 그런데 통전(通典) 변방문(邊防文)은「肅愼之國 周武王及成王時 皆貢楛矢石砮 爾後千餘年 蜼秦漢之盛 幕能治也」라 격찬하였다. 즉「숙신은 1,000여 년 동안(周成王 이후 1,000여년) 강성하여 진과 한의 강성으로서도 능히 도모하지 못했다」하였으니 주성왕(B•C 1,020년) 이후 1,000여 년 이면 춘추전국도 다 지나가고 진한(秦漢)의 연대에 이른다. 그러므로 「蜼秦漢之盛幕能治也」는 과연 정곡(正鵠)을 얻은 글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여 조선=숙신의 세력은 진한 때까지도 중원을 지배한 것이다.
 

黃河文明 심볼(象徵) 甲骨文字

 각설ㆍ한문문화~황하문명은 중원대륙의 황하권(黃河圈)을 장악한 자의 문명이다. 또 황하문명의 꽃이오 심볼(象徵)이라 할 갑골문자와 역서(曆書)[法]등은 오로지 동이족의 정통왕조인 「순(舜)−은대(殷代)」에 완성된 산물이다.「東夷造歷實無疑問」을 말하는 서량지(徐亮之)나「古朝鮮之地何在? 姜亮夫以爲 朝鮮本殷民族分佈地……」를 단정하는 임혜상(林惠祥)등 중국의 현역 사가(史家)들은 동이(=조선)가 황하문명의 주인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조선은 황하문명의 주인이오, 漢子문화의 주인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과시(果是) 동양문화사 내지 동서역사의 개조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오, 그래야 마땅할 일이다. 그렇다면「은의문자(殷의文字」(甲骨文字) 이래「漢文까지」의 참 주인공을 규명키로 하자.

 이미도 말한 것처럼 현존한자(現存漢字) 53,525자가 모두 우리말 이두문으로 그 발음기호−반절음(反切音)이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과소 음미 평가해도 심상치 않은 시사를 주는 일이다. 한 두 글자의 예외도 없이 53,525자 모두가 한국발음으로 되어 있고 이 같은 발음표기[반절음(反切音)]가 옥편상(玉篇上)에 쓰여진 전통과 그 역사만도 물경2천년(勿驚二千年)!이다. 이제 그 전말(顚末)을 규명해 본다.
 

漢文發音表記(反切音) 使用 顚末 

 반절음이란 漢字음운법으로서 어떤 문자의 음을 표기할 때 이미 아는 두 글자음 즉 상자(上字)의 성(聲)과 하자(下字)의 운(韻)을 합하여 별개의 1음(一音)을 구성하는 법(法)이다. 예를 들면 학(학)의 반절음을「轄覺」(으로도 적는다.)이라 적고 上字 의 聲「ㅎ」과 下字 의 韻「악」을 합호(合呼)하여「학」으로 발음한다. 본래 한문자(漢文字)의 발음을 표시하는 데는 음석(音釋)[문자의 음과 해석]만을 썼다.(예:說文의「」ㅆ, 與古文仁同云云)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전한~후한시)되면서 서역으로부터 반절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혹설(或說)로는 위(魏)[220~265 A•D] 손염(孫炎)이 창시했다고도 하고 혹은 후한 때(25~220 A•D) 에 역경(譯經)사업을 착수한 때부터 생겨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반절법은 불자전래(佛者傳來)나 역경사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한국의 반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이두문 표기는 진작부터 있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압록강(鴨綠江)」의 고명(古名)은「압수(鴨水)」혹은「아리수(阿哩水)」인 데「아리(阿哩)」는 다름아닌 (鴨−오리압)의 이두문이다. 그뿐인가, 신라의 왕호(王號) 마립한(麻立汗), 이사금(尼師今)은 말한(馬韓), 잇금[繼王(잇은 임금)]의 상고이두(上古吏讀)이다. 고대 한국인들은 이두문을 음(音)으로만 표시하지 않고 훈(訓)[義]으로도 이두 표기 했다. 前記
가 訓을 쫓아「鴨」으로 적히고 혹은 음으로「압록(鴨綠)」이 된 것이나 주몽(朱蒙)이 송양왕(松讓王)의 항복을 받고 그를 다물후(多勿侯)로 임명했는데 다물(多勿)은 고구려말로「땅을 무른다」는 말이므로 다물(多勿)이라 했다 하였으니 다물(多勿) 역시 이두문이다. 

  二年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三國史記 卷13 高句麗本紀第一) 

 그렇기 때문에「반절음법」(=한국고대 이두법)이 漢나라 때나 불교전래 때 서역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설은 믿을 수 없다. 漢字의 반절음은 현용한자(現用漢字) 전부가 한국식발음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주장대로 거금(距今) 2,000년 전(前漢)에 반절음이 옥편에 쓰여지기 시작했다면 당시의 중국 땅에는 한국식 漢字발음을 하는 계층이나 민족이 漢文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는 확증이 된다. 그러나「석문서록(釋文序錄)」이라는 책은 前記 손염(孫炎)[위(魏)]의 창시설과(創始說) 주옹(周顒)의 시창설(始創說)을 비야(非也)라고 부정하면서 반절음은 글자가 생기면서부터 그 자체 안에 있게 된 것으로서 예를 들면「이대(而大)」가「연(耎)」이며「족역(足亦)」이「적(跡)」인 것과 같다고 기발한 반론을 했다. [註ㆍ그러나 漢字전부가 복자(復字)도 아니고 복자에도 예외가 많다.] 

   釋文序錄운 古人音書 止爲譬況之說 孫炎始爲反語 考古編 謂周顯始有翻切 
   非也 按 音之有反切 與字俱生 如而大之爲耎 足亦之爲跡 始也(?書札記) 

각설, 반절법의 윗 글자를 절자(切字), 음자(音子), 부자(父字)라 하고 下字를 운자(韻字), 모자(母字)라 하고 양자(兩者)를 합호한 것을 歸納音이라 한다.
「반절」의 별칭을 번절(翻切), 절자(切字), 절운(切韻), 반음(反音), 반운(反韻)등으로 호칭하는 용례(用例)도 있다.

 이렇게 한국고대 이두문자에 불외(不外)한 반절음법이 한문 옥편인「집운(集韻)」(註7),「광운(廣韻)」(註8) 강희자전(康熙字典) (註9)등에 실려오고 있는데 현존 5만여 자의 漢字발음이 한字의 예외도 없이 한국식 발음으로 되어 있으며 적어도 2,000년 동안 이렇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

 아무리 <우연의 일치>라는 둔어(遁語)가 있다 하지만「확률100%」의 벽을 뚫을 우연은 없기 마련이다. 현존 중국인들은 옥편상에서 반절음(발음기호)이「사문화(死文化)」된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민국7년[1918년] 11월에 제정한 「주음자모(注音字母)」40자(現用 37자)와 미국인 ‘Sir Thomas Wade(1818~95) [註10]이 만든「漢字음의 로마자 표기방법」인 어문자이집(語文自邇集)[1867]의 이른바 Wade-style(웨이드식) 표기법을 대용하고 있다.

 

亂調 보이고 있는 四聲「音韻法」

▲ <註>본인의 조사로는 漢音, 吳音 가운데 한국발음과 일치하는 확률이 오음보다 한음이 더 많다     ©
 한편 現存 중국인들은「평상거입(平上去入)」의 4성(四聲)으로 되어있는「음운법」에 있어서도 난조를 보이고 있으니 저들은 숫제「입성(入聲)」을 없애고 대신「평성(平聲)」을 양분하여「상평(上平)」「하평(下平)」으로 하고 上平聲(-), 下平聲(/), 上聲(∨), 去聲(、)으로「주음부호(注音符號)」로 표시하며 Wade식에서는 상(上)때문에 50,000여 개의 漢字가 우선  「平,上,去,入」의 4종류로 구분
되고 다시 50,000여 자가 106개의 음운자모에 의하여 106개 파(派)로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본이 되는 음운자모의 입성문자 17자도 단, 한자의 예외도 없이「한국발음」으로 적히고 있다.(평, 상, 거성도 마찬가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문옥편의 실례를 몇 개 든다. 

한음(漢音)[註12], 오음(吳音)[註12] 혹은 당음(唐音)[註12]의 세가지「반절음」이 現用되고 있으나 漢音과 唐音은 동음이칭(同音異稱)[같은 것]이고 漢, 吳 양음(兩音)도 어느 쪽이 더 한국음에 가까운가를 말하기는 힘들다. 왜 그런고 하니「」의 한음은「근어절(斤語切)」(거)이오, 오음은「창차절(昌遮切)」(차)이니 어느 것이든 한국발음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漢)가 더 한국적인지「차」(吳音)가 더 한국음(韓國音)에 가까운 것인지 정의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다만 전시(前示)「락(酪)」의 경우 漢音「락」은 현용한음(現用韓音)이지만 吳音「로」는 사용 빈도가「락」(漢音)보다 적기 때문에 이러한 용례를 통계하여 보면 한음(漢音)이 오음(吳音)보다 현용한음(現用韓音)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또「凡儒者多用漢音하고 佛經多用吳音의」라 하니 블교보다도 유교에 탐닉(耽溺)했던 역사가(지금부터 따져보면) 아무래도 가까우니까 한음의 용례가 더 많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존 중국인들의 발음은「漢ㆍ吳」음의 어느 쪽 에도 해당 안 되는 발음을(옥편 따위는 무용지물인양) 해대고 있다.



「漢吳」음의 구별이나 이해를 돕기 위해 옥편의 용례 몇 개를 더 들겠다. 위의 漢ㆍ吳음 대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漢音은 한국 現用 발음상 그 사용빈도가 많고 吳音은 그것이 적다는 것이다. 결국 吳音漢音보다 먼저 쓰여졌고 漢音은 늦게(최근)에 쓰여지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얻는다. 



---> 계속

[펌]http://khanhistory.sidaesori.co.kr/sub_read.html?uid=69§ion=sc140

===